나, 아니면 익명적 존재에 관한 서사

나, 아니면 익명적 존재에 관한 서사

임 태 규(예술 철학)

이 글은 김형진의 작가노트를 대신하는 기술임을 밝혀둔다. 왜냐하면 글 내용의 대부분은 그와 잠깐 나눈 대화 속에서 간취한 심중소회(心中所懷)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진의 작업이 2009년부터 줄곧 보여준 칠교(七巧)판을 연상시키는 정방형의 화면위에 다양한 형태의 블록을 조합하고 때로는 해체하며 조직된, 독특한 화면 형식의 이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우리는 그가 펼쳐낸 화면의 심연으로부터 그의 방황하는 삶의 문법을, 아니면 지극히 감성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 철학적 논리를 담아내려는 고민과 의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업을 ‘존재에 관한 서사’들이 그물망처럼 직조된 시각언어의 체계로 이해한다. 사실 이 시대의 ‘존재’에 관한 물음은 더 이상 관념이나 형이상학적 논의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철학에서 ‘존재’는 실재의 문제이고 일상적 삶이고, 늘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기점이기도 하다. 김형진의 그림을 마주하면 다양하게 배치된 퍼즐들의 혼돈 속에서 우리의 흐트러져버린 시선을 응집시키는 형상을 찾아낼 수 있다. 그 일련의 형상들은 우리의 주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누구이거나 또 다른 누구일 것이다. 그가 배치하는 인물 형상들의 심연에는 그 자신으로 환기된 존재이거나, 아니면 익명적 존재들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존재’에 관한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생물학적 근거들에 의존해서 그의 그림을 이해해보자.

사람의 시각은 주변 세계의 어떤 곳에서든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려는 심리적 경향성이 있다고 한다.(김우창 [풍경과 마음]) 이러한 심리는 우선 생소한 세계 속에서 나와 유사한 존재 대상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기도 하고,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나와 유사한, 아니면 나에게 익숙한 형상을 발견하려는 심리적 본능일 것이다. 주변 색에 따라 보호색으로 위장하는 카멜레온의 위장 전략이나 대나무 가지와 유사한 몸의 구조를 가진 대벌레 등 수 많은 생명체가 주변과 닮은꼴로 유전된 것은 생존 본능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자연 사물에서 사람의 형상이나 익숙한 동물의 형상을 찾아내어 이름 붙이는 습관이나 생사의 문제를 자연 풍수와 관계지우는 동아시아인들의 삶의 방식도 생존 본능과 유사한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심리 본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문제는 아마도 나와 동일한 형상을 발견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꾀하려는 일종의 생존 전략인 것 같다. 원시 제례의식에서 시작된 여러 예술 장르의 기원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진 자연 현상과의 동일시[조화]로부터 불안 심리를 극복하려는 생존 본능과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예술의 동력은 바로 자연 인식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이렇게 축적된 문화 정신의 근거에는 생명체의 생물학적 본능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외형이 거의 좌우대칭 아니면 방사대칭 구조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신체구조나 다양한 동물군의 형상을 비롯해서, 방사선으로 가지를 벌리고 자라는 나무와 여타 식물들의 외형은 위에서 보면 방사구조를 이루고 옆에서 보면 거의 모두가 대칭 구조를 이룬다. 그런 생태 구조 속에는 중력에 대항하는 힘의 원리와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 내지는 적응의 자연적 유전 비밀이 숨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비밀스런 역설의 원리 속에는 균형의 법칙이 숨겨져 있다. 마치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 적절한 균형의 법칙을 유지하면서 세계의 조화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유가적 삶에서는 ‘중용’을 필수 규범처럼 따랐으며, 장자도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에 비유해서 도를 삶의 중심에,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놓았던 것이 아닐까?

균형이 마치 생존의 원리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대칭 구조의 익숙함이 어떤 심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래야만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심리는 생물학적 ‘존재’의 유전적 성질에 원인을 두고 있으며, 분명한 것은 생명체의 대칭 구조는 근본적으로 생명 보존의 의지가 잠재하는 전략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 작품에서 균형을 미적 요소로 중시하는 맥락도 이러한 ‘존재’의 본능적 경향성으로 추측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김형진이 조직해내는 작업 형식에도 이런 생물학적 존재 법칙이 장착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화면에 배치하고 있는 부등변삼각형의 나무 조각들, 그리고 부등변삼각형의 내각을 잘라내었지만 세 변의 선을 연장하면 여전히 삼각형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나무 조각 형상들은 때로는 파열되고 때로는 응축되는 긴장의 패턴을 반복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의 패턴은 마치 모든 정방형의 화면이 만들어낸 시각적 균형의 완전성에 저항하는 소극적 자유를 즐기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의식화된 형식 구조인 듯 보이면서도, 때로는 중력을 거스르는 무작위적 나열인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화면은 힘의 균형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도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감상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김형진은 반복되는 그 파열과 응축의 행위를 통해 화면에서 나, 아니면 익명적 존재의 형상을 조직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어떤 의미는 바로 존재의 존재성, 아니면 존재 일상에 대한 그의 관심이며, 그것은 자연을 포함하는 삶의 일상으로부터 체험되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창작 방식은 대상이 전해주는 시각 체험을 주관적 서사로 환기시켜 온 동아시아 예술 전통과 닮아 있으며, 자연친화적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진 습관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존재론적 사유를 담아내기 위한 몇 가지 준칙과 같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시간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형식과, 그 형식은 유한한 존재의 불완전성으로 투사된다는 것이다. 그가 삼각형의 내면에 나무의 나이테로 그려 넣은 표현 형식은 일종의 시간이 축적한 삶의 궤적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시간 속에는 익명적 존재의 삶이 녹아들었다. 정지된 듯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유발하는 흩어진 조각들은 불안한 심리의 투영일 것이다. 이러한 창작 방식은 마치 시간성의 문제를 존재 탐구의 축으로 이해한 하이데거의 사유 방식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가 의도하는 이러한 작업 태도는 그가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니면 작업 과정이나 끝내고 붙여졌을 작품의 명제들에서도 유추된다. praying, holding, gazing, pouring, working, nailing, writing 등등, 지속해서 붙여진 현재 진행형 접미사 –ing는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도 유한한 존재 저편에서 흐르는 분절시킬 수 없는 시간의 지속을 간접적으로 밝히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속되는 시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연한 시선으로 어떤 대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언젠가 찍어두었을 카메라 속의 영상을 응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하거나 햄버거를 먹거나 커피를 따르기도 하고, 모바일에 심취하기도 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이것은 누구나의 일상이면서 그만의 기호(嗜好)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의 그림에는 우리의 삶은 원래 그렇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과 힘의 균형적 구조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에 인물의 심리나 감정 변화를 시각 체계로 구성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작업 의도는 ‘불완전한 형상, 아니면 분절된 형상(A partial shape)’ 시리즈의 작업 과정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 작업들은 다른 작업들과 비교해 추상적 성격에 기울고 있다는 맥락에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김형진의 작업 방향을 예측하게 한다. 작품의 명제처럼 전체를 분절시키고, 분절된 부분은 불완전한 형상으로 남겨져 있다. 이 심연의 과정에서 존재는 불완전한 실체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마치 쉘 실버스타인의 그림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에서 이가 빠져 버린 동그라미가 자신의 한쪽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완전함을 꿈꾸는 끝나지 않는 욕망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사람들의 삶은 원래 그렇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김형진의 그림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가능성에 주목해 본다.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각체계로 풀어내면서, 그의 예술 사유는 더욱 깊어질 것이며, 그 속에 서 지금보다 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를 기대한다. 그림을 감상하고 글로 적는 일은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는 일과 같다. 나는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말한 어느 학자의 고민처럼, 이 글이 반역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