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태 규(예술 철학)

이 글은 김형진의 작가노트를 대신하는 기술임을 밝혀둔다. 왜냐하면 글 내용의 대부분은 그와 잠깐 나눈 대화 속에서 간취한 심중소회(心中所懷)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진의 작업이 2009년부터 줄곧 보여준 칠교(七巧)판을 연상시키는 정방형의 화면위에 다양한 형태의 블록을 조합하고 때로는 해체하며 조직된, 독특한 화면 형식의 이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우리는 그가 펼쳐낸 화면의 심연으로부터 그의 방황하는 삶의 문법을, 아니면 지극히 감성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 철학적 논리를 담아내려는 고민과 의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업을 ‘존재에 관한 서사’들이 그물망처럼 직조된 시각언어의 체계로 이해한다. 사실 이 시대의 ‘존재’에 관한 물음은 더 이상 관념이나 형이상학적 논의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철학에서 ‘존재’는 실재의 문제이고 일상적 삶이고, 늘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기점이기도 하다. 김형진의 그림을 마주하면 다양하게 배치된 퍼즐들의 혼돈 속에서 우리의 흐트러져버린 시선을 응집시키는 형상을 찾아낼 수 있다. 그 일련의 형상들은 우리의 주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누구이거나 또 다른 누구일 것이다. 그가 배치하는 인물 형상들의 심연에는 그 자신으로 환기된 존재이거나, 아니면 익명적 존재들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존재’에 관한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생물학적 근거들에 의존해서 그의 그림을 이해해보자.

사람의 시각은 주변 세계의 어떤 곳에서든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려는 심리적 경향성이 있다고 한다.(김우창 [풍경과 마음]) 이러한 심리는 우선 생소한 세계 속에서 나와 유사한 존재 대상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기도 하고,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나와 유사한, 아니면 나에게 익숙한 형상을 발견하려는 심리적 본능일 것이다. 주변 색에 따라 보호색으로 위장하는 카멜레온의 위장 전략이나 대나무 가지와 유사한 몸의 구조를 가진 대벌레 등 수 많은 생명체가 주변과 닮은꼴로 유전된 것은 생존 본능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자연 사물에서 사람의 형상이나 익숙한 동물의 형상을 찾아내어 이름 붙이는 습관이나 생사의 문제를 자연 풍수와 관계지우는 동아시아인들의 삶의 방식도 생존 본능과 유사한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심리 본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문제는 아마도 나와 동일한 형상을 발견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꾀하려는 일종의 생존 전략인 것 같다. 원시 제례의식에서 시작된 여러 예술 장르의 기원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진 자연 현상과의 동일시[조화]로부터 불안 심리를 극복하려는 생존 본능과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예술의 동력은 바로 자연 인식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이렇게 축적된 문화 정신의 근거에는 생명체의 생물학적 본능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외형이 거의 좌우대칭 아니면 방사대칭 구조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신체구조나 다양한 동물군의 형상을 비롯해서, 방사선으로 가지를 벌리고 자라는 나무와 여타 식물들의 외형은 위에서 보면 방사구조를 이루고 옆에서 보면 거의 모두가 대칭 구조를 이룬다. 그런 생태 구조 속에는 중력에 대항하는 힘의 원리와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 내지는 적응의 자연적 유전 비밀이 숨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비밀스런 역설의 원리 속에는 균형의 법칙이 숨겨져 있다. 마치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 적절한 균형의 법칙을 유지하면서 세계의 조화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유가적 삶에서는 ‘중용’을 필수 규범처럼 따랐으며, 장자도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에 비유해서 도를 삶의 중심에,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놓았던 것이 아닐까?

균형이 마치 생존의 원리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대칭 구조의 익숙함이 어떤 심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래야만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심리는 생물학적 ‘존재’의 유전적 성질에 원인을 두고 있으며, 분명한 것은 생명체의 대칭 구조는 근본적으로 생명 보존의 의지가 잠재하는 전략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 작품에서 균형을 미적 요소로 중시하는 맥락도 이러한 ‘존재’의 본능적 경향성으로 추측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김형진이 조직해내는 작업 형식에도 이런 생물학적 존재 법칙이 장착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화면에 배치하고 있는 부등변삼각형의 나무 조각들, 그리고 부등변삼각형의 내각을 잘라내었지만 세 변의 선을 연장하면 여전히 삼각형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나무 조각 형상들은 때로는 파열되고 때로는 응축되는 긴장의 패턴을 반복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의 패턴은 마치 모든 정방형의 화면이 만들어낸 시각적 균형의 완전성에 저항하는 소극적 자유를 즐기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의식화된 형식 구조인 듯 보이면서도, 때로는 중력을 거스르는 무작위적 나열인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화면은 힘의 균형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도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감상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김형진은 반복되는 그 파열과 응축의 행위를 통해 화면에서 나, 아니면 익명적 존재의 형상을 조직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어떤 의미는 바로 존재의 존재성, 아니면 존재 일상에 대한 그의 관심이며, 그것은 자연을 포함하는 삶의 일상으로부터 체험되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창작 방식은 대상이 전해주는 시각 체험을 주관적 서사로 환기시켜 온 동아시아 예술 전통과 닮아 있으며, 자연친화적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진 습관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존재론적 사유를 담아내기 위한 몇 가지 준칙과 같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시간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형식과, 그 형식은 유한한 존재의 불완전성으로 투사된다는 것이다. 그가 삼각형의 내면에 나무의 나이테로 그려 넣은 표현 형식은 일종의 시간이 축적한 삶의 궤적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시간 속에는 익명적 존재의 삶이 녹아들었다. 정지된 듯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유발하는 흩어진 조각들은 불안한 심리의 투영일 것이다. 이러한 창작 방식은 마치 시간성의 문제를 존재 탐구의 축으로 이해한 하이데거의 사유 방식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가 의도하는 이러한 작업 태도는 그가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니면 작업 과정이나 끝내고 붙여졌을 작품의 명제들에서도 유추된다. praying, holding, gazing, pouring, working, nailing, writing 등등, 지속해서 붙여진 현재 진행형 접미사 –ing는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도 유한한 존재 저편에서 흐르는 분절시킬 수 없는 시간의 지속을 간접적으로 밝히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속되는 시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연한 시선으로 어떤 대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언젠가 찍어두었을 카메라 속의 영상을 응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하거나 햄버거를 먹거나 커피를 따르기도 하고, 모바일에 심취하기도 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이것은 누구나의 일상이면서 그만의 기호(嗜好)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의 그림에는 우리의 삶은 원래 그렇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과 힘의 균형적 구조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에 인물의 심리나 감정 변화를 시각 체계로 구성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작업 의도는 ‘불완전한 형상, 아니면 분절된 형상(A partial shape)’ 시리즈의 작업 과정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 작업들은 다른 작업들과 비교해 추상적 성격에 기울고 있다는 맥락에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김형진의 작업 방향을 예측하게 한다. 작품의 명제처럼 전체를 분절시키고, 분절된 부분은 불완전한 형상으로 남겨져 있다. 이 심연의 과정에서 존재는 불완전한 실체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마치 쉘 실버스타인의 그림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에서 이가 빠져 버린 동그라미가 자신의 한쪽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완전함을 꿈꾸는 끝나지 않는 욕망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사람들의 삶은 원래 그렇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김형진의 그림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가능성에 주목해 본다.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각체계로 풀어내면서, 그의 예술 사유는 더욱 깊어질 것이며, 그 속에 서 지금보다 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를 기대한다. 그림을 감상하고 글로 적는 일은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는 일과 같다. 나는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말한 어느 학자의 고민처럼, 이 글이 반역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2014 –

심소미

김형진의 회화는 선과 면이 화면을 분할하며 인물의 형상을 생성해내는 특징을 가진다. 다양한 형상의 도형들이 서로 군집된 인물은, 주로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개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하철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카페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고, 무심코 화장을 고치는 모습 등 인물들을 둘러보다보면 공통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홀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으나 인물이 주는 정감은 고독하고 적막하다. 더욱이 이들의 시선은 화면 너머 혹은 화면 속 어딘가로 향하며, 개인에게 내제된 고립된 심상을 더한다.

누구도 시선을 마주칠 수 없이 프레임 속 나만의 공간에 놓인 인물의 모습은 군중 속에서 개별화된 현대인의 인상과도 닮아있다. 점점 더 스펙터클해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은 거대화된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각기 단절과 소외를 경험하며, 이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군중 속 타자들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개인의 소외감은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 내성화된 보편적 소외의 순간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개인의 존재, 세계 내 존재로서의 실존감은 스토리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회화의 조형적 측면을 통해 전개되어 나간다. 무수한 조각들이 인물의 형상을 이루며 화면을 분할해나가는 조형적 특징은 그의 작업에서 특히나 두드러지는 면이다.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인체를 분절하여 다루는 방식은 미술사적 맥락에서 익숙한 어떠한 스타일 혹은 경향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소재로 취하는 일상의 사람들처럼 현실의 삶, 즉 실존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 본다면 형식적인 특징이 은유하며 심화시키고 있는 작가만의 방향을 짚어볼 수 있다.

형식이 은유하는 바를 살펴보기 전에, 이에 기반 하는 요소로서 앞서 살펴본 작업의 소재와 더불어 재료를 살펴보겠다. 브라운 톤의 색감은 조각난 도형 각각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면서 통일감 있게 화면을 아우른다. 종이의 질감을 머금듯 스며든 본 재료는, 독특하게도 인스턴트커피이다. 목탄과 커피의 농담을 조절하여 얻어진 색감은 은은하고 섬세한 인상부터 거칠고 깊은 인상까지 다양하게 구사된다. 색감이 주는 감성적 묘미와 더불어 흥미로운 점은, 인스턴트커피가 내포하는 현대적 정감이다.

바쁜 일상의 현대인에게 인스턴트커피는 나라는 존재를 각성시킴과 동시에 내면의 여유를 선사하는 모순적 속성을 지닌다. 개인의 불안하고도 강박적 심리를 자극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의 화면에서 인스턴트커피가 주는 색감은 인물이 내포한 심리에 접근하게 하며, 화면을 향한 시선을 내면의 풍경으로 이끈다.

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정황은 작가가 취하는 소재, 재료와 더불어 조형적 어법을 통하여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하학적 도형을 근간으로 하여 인물의 형상을 분할하는 방식은 첫 개인전 ‘Illogical Tangram'(2009)에서 본격화된 것으로,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해오던 ‘칠교놀이(tangram)’의 구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7개의 조각이 한 세트인 본 놀이는, 본 조각만을 사용해서 현재 1600여개의 도안을 구성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니며, 그 이상의 새로운 도안도 가능하다.

작가는 칠교놀이가 가지는 형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규약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형태로 변주가 가능한 속성에 주목하여, 현대인에게 주어진 여러 경계들을 형식화하고 이를 재구성할 계기를 자신의 화폭에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적 측면은 한 개인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자기 각성에 대한 반영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에게 갑옷처럼 입혀진 고정관념과 규제들은 그의 화폭에서 여러 조각들로 분화되어 형상을 규제하는 동시에 분열시키는 요소가 된 것이다.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선과 면으로 구분된 수많은 프레임과 모서리는 이 세계의 편견이나 고정관념들, 그리고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타자화된 시선 및 규제범위와 관계된다. 이러한 구속력으로부터 고정된 형태를 해체하여 무수한 도형들이 조합되듯 탄생한 인물은 현대인의 불안정한 심리를 반영하며, 내면에 감추어진 실존적 고뇌를 드러낸다.

기존 맥락의 연장선에 있는 두 번째 개인전 ‘Invisible Anxiety’는 첫 개인전에서 시도된 조형적 어법으로부터 실존의 본질에 중점을 두어 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작가는 본 전시의 주제목인 ‘보이지 않는 불안’과 더불어 ‘역설적 기대감’을 부재로 달고 있는데, 이는 한계 상황 속의 인간이라는 실존적 상황을 보다 심층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다.

작가는 개인의 실존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갈구하는 이중적 상태를 ‘역설적 기대감’이라 부가적으로 설명하며, 이러한 인간의 모순된 상황을 일종의 ‘공포’라 칭하고 있다.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에 복종하면서도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공포심이 존재한다.

실존에 대한 모순적 상황은 근작의 형식적 변화에서도 감지된다. 선과 선이 면을 생성하며 인물을 분할하던 전작에 비해, 근작은 명확한 형태로 구분된 도형들이 인물을 수많은 조각들로 분할시키고 있다. 파편들의 거대한 덩어리로 재구축된 인물은 마치 퍼즐처럼 흩어져나가 언제라도 해체가 가능한 모습이다. 분열과 생성 사이에서 형성된 인물의 심상은 불안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함의하며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본 전시에서는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대한 배경으로 작용하는 타자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한 내러티브도 시도되고 있다. 전시 작품 중 유일하게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Giant Deal’은 이러한 변화점을 시사해 준다. 두 명의 비즈니스맨이 대척하고 있는 구도의 본 작품은, 서로 거래를 위해 악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리전을 긴장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두 인물이 악수하는 결정적 순간을 파편화하여 서로를 관계시키는 것으로, 타자와의 관계망 속에서 생성되는 공존과 대립 그 모순된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 인물로부터 구축된 파편들은 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구속력과 같이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시각화하고 있다. 화면에 건축적 모서리를 둠으로써 드러나는 심리적 공간은, 본 전시의 연극적인 연출 방식을 통해 극화(Dramatization)된다.

캔버스의 프레임에 맞춰 정확한 규격으로 작품을 비추고 있는 조명은, 화면 속 인물을 실제의 공간으로부터 고립시키며 개인이 처한 실존적 괴리감을 극적으로 연출해낸다. 규약된 인공의 빛을 통해 과도하게 조명된 인물은 어둠 속 침묵을 깨고 갈구하듯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이다. 어둠이 감싼 철저한 고독과 불안하게 요동치는 파편들 그리고 발광하며 드러난 인물은 실존에 대한 극단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혹자는 부조리극과 같이 인간성의 허무에서 오는 공포를 직면하고, 이로부터 화면 속 조각난 인물들처럼 반향 할 것이다.

– 2011 –

황정인(전시기획, 前 사비나미술관 큐레이터)

회갈색에서 다갈색에 이르는 수많은 황토빛 이미지 조각들이 마치 퍼즐이나 패치워크처럼 짜 맞춰져 있는 정사각형의 화면. 곧이어 빛바랜 조각들의 윤곽선 사이로 낯익은 인물의 형상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온다. 마치 커다란 그물 속에 갇혀있거나, 불투명한 막에 둘러싸여 있는 인물들은 감정이 메말라 버린 얼굴 표정과 함께 하나같이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김형진의 그림에서 받은 첫 인상이다.

김형진은 동시대를 사는 도시인을 소재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대사회의 제도와 인습으로 인한 인간소외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작업은 사람이 많이 붐비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 인물을 관찰하고, 눈에 띄는 인물들을 사진으로 포착하거나 즉석에서 연필로 스케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수집된 인물들을 화면에 옮기기 전에 작가는 인물의 동세가 지닌 최소한의 방향성만 감지할 수 있는 직선을 빠르게 그어나가면서 하나의 정제되고 단순화된 형태의 인물상을 만든다. 그러면 인체의 곡선은 완전히 사라지고, 조각난 사각형과 삼각형의 조합들로만 이뤄진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단순화된 인체 표현 외에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선들과 도형의 조합들이 유독 눈에 띄는데, 각각의 형태가 지닌 특징을 살펴보면 모두가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를 규제하고 있는 일종의 틀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직, 수평의 연장선이 만들어낸 곁가지 도형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체를 감싸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위치가 대개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손목, 팔꿈치, 어깨, 무릎, 발등 주요 신체부위 주변에 분포하여 인물의 동작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물의 주변에 또 다른 영역이 존재하는 것을 가시화한 것으로, 인물을 둘러싼 고정관념, 편견, 타인의 시선 등 사회제도와 인습의 총체를 의미한다. 즉 현대인을 상징하는 그림 속 인물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타인, 사회 등의 타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과 사회의 고정관념이 인간 주체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김형진의 작업을 처음 대하는 이들은 이처럼 선과 선이 만나 이뤄진 조각난 이미지들이 화면의 중심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모습에서 20세기 초 큐비즘과의 형식적 유사성을 찾아내고자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사실 그의 작업은 입체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림 속 인물은 분할된 조각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하나의 전체적인 이미지로 거듭나는 구조를 취하지만, 이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인 시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본 인물을 단순화된 도형들의 조합으로 탄생시킨, 철저하게 평면적인 그림이다.

더욱이 그의 그림은 고대 중국부터 전해 내려오는 퍼즐놀이 중 하나인 칠교놀이(七巧, tangram)에 조형적 근간을 두고 있다. 크고 작은 5개의 직각이등변삼각형과, 정사각형 1개, 평행사변형 1개 등 총 7개 조각으로 구성된 칠교는 각각의 조각을 이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모형을 고안해내는 게임이다. 정사각형의 틀에서 7개의 작은 조각을 꺼내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형의 가짓수는 10,000개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가짓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모형의 기본이 되는 7개의 조각은 가로 세로 10센티미터의 작은 정사각형 형태의 틀 안에 다시 가둬지게 된다(본래 칠교는 7개의 조각이 기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 조각 수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형태의 변형 퍼즐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 역시 이러한 기본 틀 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김형진의 작업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작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수천 명의 현대인들도 각각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관념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속박된 존재인 것이다. 캔버스의 형태가 정사각형 모양이면서, 작품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사각형의 네 모서리 안에 가득 채워지게 표현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가 그리는 인물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한번쯤 봤음직한 익숙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누군가를 정처 없이 기다리는 모습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의 행동양식을 단순화하고 보편화하면서 동시대적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또한 인물들 간에는 유독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들이 있다. 바로 작품 속 인물들의 시선이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고, 인물의 몸 또한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먼저 한쪽 방향으로 시선을 처리한 것은 개성 없이 천편일률적인 사고로 일관하고 있는 현대인을 풍자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사진과 드로잉으로 담은 인물을 최종적으로 화폭에 옮길 때에도 항상 의도적으로 시선이 한 방향을 향하도록 통일되게 처리한다. 다음으로 몸의 표현이다. 그가 그린 인물의 신체는 마치 고대 이집트 미술가들이 무덤벽화의 인물들을 그릴 때 신체 각 부분의 특징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옆얼굴과 발과 다리의 측면을 고집했던 것과 유사하다. 당시의 화가들은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하나의 형식적 규칙에 따라 인물을 그렸는데, 인물들은 일정한 형식에 의해 모두 뻣뻣한 자세로 표현되었다. 실제로 이집트 미술가들은 인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당시의 내세관에 입각하여 완벽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는데, 이를 위해 그들은 인체표현에 있어서의 기하학적 규칙성을 강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을 미루어 볼 때, 김형진의 회화는 기하학적 인체표현으로 동시대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물상을 그려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또 다른 해석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실 작가가 이렇게 인물(현대인)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게 된 것은 대학시절 시카고의 황량한 도시 이미지를 그린 시리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문명이 일궈낸 거대한 도심 한복판에서 작가가 마주한 것은 주인 없는 집처럼 인기척 없이 바람만 휑하게 부는 텅 빈 거리다. 문명에 의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벌어지면서 인간은 존재론적 의미를 상실하고 자연스럽게 익명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도시문명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이후 자연스럽게 작가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거리를 스쳐지나가는 익명의 사람들을 주제로 한 로 이어진다. 그는 아파트, 거리 등 일상 속 도시 공간에서 만나는 인물의 단상을 하나의 명확한 윤곽선이 있는 고정된 이미지로 표현하지 않고 흐릿한 인물의 그림자 형태로 표현해 나간다. 특정인이 아닌 익명의 인물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표현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작가의 망막을 빠르게 스쳐지나간 인물의 몸짓은 붓으로 거칠게 표현되면서 주위에 많은 잔상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 밖 관찰자(작가)의 시선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주인공과 작가 간의 보이지 않은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심리적인 거리감은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변화하는데, 마치 사각형으로 된 관념의 렌즈로 도시인의 모습을 관찰하듯 인물의 신체를 정사각형의 틀 안에 가두고, 신체의 움직임을 조각난 도형이미지로 재차 제한하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인물은 그 안에서 더욱 고립된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소외의 의미를 한층 강화시켜 나간다. 결과적으로 보면, 문명의 상징인 도시에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여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긴 것이 오늘날의 작품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회화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사용하는 재료에 있다. 사실 현대의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 재료에 대한 언급이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김형진의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작가는 먼저 캔버스에 한지를 접착한 화면에 스케치에서 옮긴 인물의 생김새를 목탄으로 그리고, 면을 채색해나간다. 이때 채색의 주재료로 쓰이는 것은 다름 아닌 인스턴트커피이다. 커피의 농도에 따라 색을 다양하게 조절하여 원하는 채도의 색을 얻는데, 이미지의 윤곽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목탄을 직접 가루형태로 갈아서 먹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명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학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것이 모노톤의 농담 표현을 더욱 자유롭게 해준다. 작가가 유독 커피를 작품의 주요 채색 재료로 사용하는 이유는 작품 속 인물들은 동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점과 맞닿아 있다. 현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호식품이자 습관화된 일상의 상징이 되어버린 커피, 특히 인스턴트커피가 자연스럽게 작품의 재료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커피로 채색된 면은 처음에는 고르게 채색되었지만 작가의 붓 터치와 커피자체가 지닌 입자의 성질로 인해 빛바랜 고문서와 같이 누렇고 낡은 느낌으로 완성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물의 배경이 되는 면은 화려한 원색에 기반을 두되, 채도가 낮아서 갈색의 모노톤 인물의 느낌과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작가는 각 인물의 동세가 주는 분위기에 의해 색을 선택하지만 이러한 단색의 색면표현은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가득한 도시 풍경을 상징하는 동시에, 무미건조한 색으로 일관되게 표현된 인물에 시선을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조형요소가 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채색된 화면 위에 보조제를 이용하여 겉 표면을 불투명하게 코팅하여 화면 전체의 톤을 부드럽게 정리하고 작품 전체에 통일된 느낌을 부여한다. 마치 밀랍으로 코팅된 것 같은 표현은 작품 속 인물이 영원한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는 듯한 느낌마저 전달한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을 잊어버린 채, 외부의 시선과 사회통념에 의해 개인의 생각과 목소리를 낮추고, 통일된 행동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모습은 김형진의 작품에서 외부의 제약에 의해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꼼짝할 수 없이 갇혀버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작품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림 속 주인공의 모습이 곧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현대 도시민의 삶이자, 작가 본인의 모습이며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이끄는 시류에 편승하여 개별적인 주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은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인간 존재 본연의 모습을 앗아간 지 오래다. 이것이 한 시대의 풍속처럼 굳어져 다음 세대가 바라볼 과거의 슬픈 초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김형진의 그림은 우리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 2009 –

관념과 인습의 칼날로 조각난 신체, 그 안에서 마주한 우리의 초상
김형진 개인전_20090826-20090909_갤러리 이즈

황정인(독립큐레이터)

김형진의 작업에서 인물의 동세가 사회의 고정관념, 타인의 시각에 의해 규제되어 부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은 그의 첫 번째 개인전 서문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전의 해석이 인물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인체의 각 부분이 조각나 있는 상태로 그려진 상황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해석을 늦었지만 짤막하게나마 덧붙여보고자 한다.

김형진의 작업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누렇게 빛바랜 조각들이 서로 얽혀져 있는 구조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의 형상이다. 작품의 기본적인 구성은 중국의 전통놀이인 칠교에서 바탕을 두고 있지만, 칠교를 이루는 기하학적인 조각의 형태가 그림 속에서 인체의 부분을 이루는 기본 형태로 자리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먼저, 어떤 한 인물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그 사람의 성별, 나이, 직업, 생김과 같은 객관적인 설명 외에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그와 잠깐이나마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첫인상, 혹은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성격 내지 그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에 의한 기억을 바탕으로 하나의 인물을 정의내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서 각각의 기억들이 하나의 인물을 판단하거나 대변하는 전체가 될 수 없듯이, 그의 그림에서 조각난 파편은 타인의 시각에 의해 갈라진 기억, 인상이 되어 인물을 이루는 이미지의 일부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파편화된 신체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유기적인 구조를 이뤄나가야만 하나의 인물이 완성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것(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 외에도 타인의 의해 정의되는 과정(남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이뤄질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정체성 내지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다는 점과 매우 닮은 구석이 있다. 단, 이것이 김형진의 그림에서 나타날 때에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나 편견, 인습이라는 다소 네거티브한 맥락을 동반하기 때문에, 보다 정제되고 날카롭고 예리한 모서리와 각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작업노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무한경쟁시대에서 타인은 나와 함께 숨을 쉬는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동시에 비교와 분류의 대상인 잠재적 경쟁상대로 취급된다. 분류의 기준은 지속적으로 생산되며, 생산된 시각이 일반화되는 과정을 통해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으로 굳어진다. 분할된 기하학적 도형은 무의식적으로 흡수된 관점의 결정체로서 이것들이 맞물려 인물의 형상을 구축한다. 일어설 수도 없는 비좁은 정방형의 틀 안에서 인물들은 생산된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이며, 동시에 비교와 분류의 대상으로서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는다.”- 김형진의 작업노트 중에서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김형진의 그림에서 관습과 인습에 의해 규정되어 개인이 지닌 정체성을 상실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은 영화 및 매체이론가인 R. L. 러츠키(R. L. Rutsky)가 독일의 영화감독 프리츠 랑(Fritz Lang)의 1926년 영화 를 매체 미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글에서도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아래에서 인용한 러츠키의 글은 그의 저서 에서 현대사회의 테크놀로지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사례로 든 영화해석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기계화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로봇이나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노동자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이것을 사회적, 정치적 신체의 소외와 파편화된 사회적 신체와 맞물려 해석한 점이 흥미롭게 다가오기 때문에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내부에서 노동자는 시스템의 기능적, 테크놀로지적 합리성에 적응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조밀하게 정렬된 기하학적 대형에 맞춰 기계처럼 기능해야 하며, 이때 그들의 개별적 정체성은 상실된다. (중략) 기계화가 형상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 정치적 신체의 소외다. (중략) 절단되거나 파편화된 사회적 신체는 비유기적인 것, 테크놀로지적인것,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노동자는 인간의 생명을 정의하는 영혼이나 감정을 상실한 채 로봇이나 좀비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 R.L.Rutsky, High Techne: Art and Technology from the Machine Aesthetics to the Posthuman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공장의 노동자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좀더 넓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이것은 외부세계(사회)에 의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규격화 된 삶을 사는 인간이자,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결국 타인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은유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인간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기능하지 못하고 언제라도 타인으로 대체 가능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그에게서 한 사람으로서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규격화된 사고의 틀이 김형진의 그림에서 인물을 안팎으로 둘러싸고 있는 차가운 직선과 도형들을 낳고,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하나의 인물을 형성한다. 그래서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한 로봇과도 같은 인물이 그림의 중앙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러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혼과 감정을 상실해버린’ 소외된 인간이 시각화되어 탄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의 그림에 나타난 ‘조각난 신체’, ‘파편화된 신체’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단계(Mirror Stage)’를 한 순간 떠올려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전에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말하는 파편화된 신체의 개념을 살펴보자면, 라캉의 거울단계는 생후 6개월 내지 18개월이 된 어린 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인식해 나가는 동일시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거울단계의 이전의 어린 아이는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고 단지 자신이 바라보는 손, 발 등 지극히 제한된 시각 안에서 신체의 부분만을 인식할 뿐이다. 아이는 점차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 전부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인간의 주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조각난 신체라는 개념은 거울 단계 이전에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이는 거울단계를 지나면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파편으로 조각난 신체의 이미지를 극복하여 통일된 전체로서의 신체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예비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김형진의 그림을 처음 대할 때, 먼저 커다란 정사각형 화면 속에 그려진 조각들을 발견하고 그 사이로 인체와의 유사한 형태를 더듬어 찾아가다보면 인물의 형상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인식하게 되는 매커니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지점과 유사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와 닮은 인물의 초상을 찾아내기 위해 눈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결국엔 그림 속 인물의 모습이 나의 몸, 나의 일상 속 행동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변증법적 동일시의 과정. 비록 라캉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좀 더 광의의 맥락에서 바라볼 때 김형진이 말하는 다음의 글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분할된 조각들 사이에서 인물의 형상을 명확하게 인지해 내듯, 나는 현실에서 그들이 분리된 방식으로 나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분리시켜 본다. 내가 바라는 가장 극적인 경험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가 돌연 그들이 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본질과, 나의 본질이 실제로 하나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비교하고 분류하던 ‘다른 점’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해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 김형진의 작업노트 중에서

– 2009 –

정효임(서울 시립 미술관 큐레이터)

김형진은 날 선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는 사회 분위기와 구성원들 스스로의 자기소외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의 작업에서 인간들은 정방형 틀 안에 홀로 앉아 운전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고 타이핑을 하는 등 반복되는 현대인의 일상에 몰입하고 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패턴화되고 상황과 개체의 특질은 지워진 채, 행위 자체가 결국 행위의 주체를 집어 삼키는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일상의 흔적

화면은 세심하고 감성적인 단계를 거쳐 구현된다. 바탕은 아크릴 물감으로 칠해지고, 중심 이미지는 캔버스에 접착된 순지 위에 커피분말과 곱게 갈아진 목탄 가루를 통해 그려진다. 몇 겹으로 칠했느냐에 따라 음영이 조절되고 겹이 더해질수록 종이는 안료를 머금으며 안정적으로 접착된다. 안료가 물과 섞여 발라지면 종이를 캔버스에 붙일 때 사용한 접착제 알갱이들이 부드럽게 점 점의 입자로 번진다. 종이 위에 올려진 안료의 막이 만들어낸 반투명의 성질은 견고한 존재감과 서정적 미감을 드러낸다. 한지의 사용과 농담을 조절해가는 발색 과정은 김형진의 동양화 교육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동양적’인 접근 방법이기보다는 익숙히 사용해온 한지와 흔한 소모품인 커피를 조합한 일상의 반영에 가깝다. 이질적인 요소들의 조합은 고유한 효과를 만들어내며 설득력을 갖는다.

압축되는 입체

기하학적 구조화와 제한된 색채사용 등은 김형진 작업에서 꾸준히 반복되어온 특징인 동시에 일면 입체주의와의 연결점을 짚어 보게끔 하는 시각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표면의 유사함과는 상이하게 그의 작업은 내용적으로 입체주의와는 상이하게 전개된다. 입체주의 사조가 3차원을 2차원에 옮기는 방편으로 기하학 형상을 사용했다면, 김형진은 오히려 실재를 압축시켜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방편으로 기하학 형상을 이용한다. 형상의 근본을 이루는 단위체를 조합하여 대상의 실재성을 평면 위에 구현하려 했던 입체주의와 평면성에 집중하는 김형진은 서로 반대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작가는 도형 단위체를 조합해 평면에 입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활용 안에서 형상을 해체하고 입체를 평면으로 환원시킨다. 그 결과, 퍼즐을 이어 만든 듯한 독특한 평면성이 획득된다. 분할된 면들은 2차원에 개념적인 볼륨을 부여하는 요소가 아닌 압축된 현실의 조각이 된다.

찰나의 시공간

표피화된 이미지는 재현의 일루전이 제거된 바탕 위에 조합된다. 인물과 배경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데 붓의 움직임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불투명 아크릴로 칠해진 단색바탕과 그 위에 마치 따로 오려져 붙여진 듯 유리되어있는 인간은 상호 대치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화면에서는 정지된 시공간에 유예되어있으나 사이버 공간 속 픽셀 무리처럼 언제 다시 흩어져 버릴지 모르는 집합체의 불안정함이 부각된다. 그려진 인물이 압축된 입체의 흔적이라면 바탕은 무의 공간이자 포착된 시간의 한 면이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위태로운 자리잡기를 하고 있는 현대인은 조각 군집으로 환원되어 찰나에 머문다.

아침에 눈을 떠 다시 자리에 들기까지 대도시의 인간들은 매일 수백, 수천 명의 타인을 지나친다. 점점 가속되는 삶의 템포에 맞추어 인생의 표면을 부유하는 개인들은 무심히 서로를 스친다. 익명의 개체들에 대한 무관심, 나아가 무관심에 대한 익숙함은 대도시의 정서를 묘사하는 대표적 클리셰이다. 김형진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현실을 분해하고 재조합하며 일상에 묻혀있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들추어내 보여준다.

– 2009 –